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器滿則溢(기만즉일)하고 人滿則喪(인만즉상)이니라.

"그릇은 가득 차면 넘치고, 사람은 가득 차면 망하게 된다."

○ 器(그릇 기) 그릇, 접시

○ 溢(넘칠 일) 넘치다, 잠기다, 지나치다

○ 滿(찰 만) 차다, 가득하다, 교만하다

○ 喪(잃을 상) 잃다, 죽다, 망하다

○ 喪(잃을 상) 잃다, 죽다, 망하다

 

 

 器滿(기만)의 滿(가득할 만)은 그릇에 물이 충만한 정도를 넘은 상태를 뜻하고 , 溢(넘칠 일)'은 그릇의 용량을 넘쳐서 흐르는 물을 의미합니다. “그릇은 가득 차면 넘친다”는 말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실려 있는 '유좌지기(宥坐之器)'의 이야기를 통해 그 뜻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유좌지기'란 항상 곁에 두고 보는그릇이란 뜻입니다.

 

어느날 공자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公)의 사당을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사당 안에는 묘하게 생긴 잔 하나가 있었는데, 옆으로 기울어진 잔이었습니다. 공자가 궁금증이 생겨 그곳을 지키는 사람에게 무슨 그릇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당 관리인의 대답입니다.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집니다.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던 자로가  공자에게 질문합니다. "가득 차고서도 넘어지거나 엎어지지 않을 도리는 없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합니다. "총명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공적이 매우 큰 사람도 겸손한 사람처럼 조심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사람도 두려운듯 처신하고, 세상 모든 재물을 가졌다고 해도 공손한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자신의 학식이나 지혜, 지위나 권력, 공적과 용기, 재물을 앞세워 오만하거나 방자한 언행을  제멋대로 저지르는 사람은 마치 가득 차면 엎어지거나 넘어지는 '유좌지기(宥坐之器)’의 신세를 모면하기 어려우므로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人滿(인만)의 滿(만)은 자만(自滿)이니 가득차지 못했는데 자신은 가득 찼다고 여기는 것으로 교만(驕慢)입니다. 喪(잃을 상)은 '잃다', '죽다', '망하다'의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人滿則喪(인만즉상)은 사람이 교만해지면 자기를 돕던 사람들이 떠나고 재물도 떠나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령 가득찬 사람이 있다 해도 사람이 스스로 교만하거나 오만해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혹은 불만과 원망을 사기 쉽고, 시기와 질투나 불만과 원망을 사게 되면 반드시 재앙을 입게 되므로 잃게 됩니다. 그릇이 차면 넘치듯, 사람이 자만(自滿, 自慢)하면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합니다.

 

옛날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다룰 때 ‘가득 찰 만(滿)’자를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사서오경중의 하나인 「예기(體記}」로 첫 시작부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傲不可長(오불가장)이며 欲不可從(욕불가종)이며 志不可滿(지불가만)이며 樂不可極(낙불가극)이라.” 풀이하면 “오만한 마음을 길러서는 안 되고 욕심을 따라서는 안되고 뜻을 가득 채워서는 안되고,즐거움을 극도에 이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는 "뜻을 가득 채우는 것은 하늘과 땅은 물론 귀신도 증오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가득 채우는 욕망과 욕심 때문에 재앙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를 지키는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가 '지족(知足)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족(止足)’입니다. 지족(知足)이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이라면,지족(止足)은 만족할 줄 알아서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친다는 뜻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지난 4월 3일에 발행한 http://blog.daum.net/footprint/36에 관련 내용이 있으니 참고를 바랍니다.  

 

 

▣ 세 가지 이야기

 

1)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 교만(驕慢)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맹사성(1360∼1438)입니다. 그는 열아홉에 장원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에 오른 뛰어난 인물입니다. 젊은 나이에 높은 벼슬에 올랐으니 처음에는 그의 자만심이 오죽 높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은 그 고을에서 유명하다는 무명(無名)의 선사(禪師)를 찾아가 묻습니다. “스님이 생각하시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내가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그러자 스님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맹사성은 “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줄 말이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스님은 녹차나 한잔하고 가시라며 붙잡습니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맹사성의 찻잔에 찻물이 넘치는데도 계속 차를 따릅니다. 이에 맹사성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합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부끄러웠던 맹사성은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지방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맙니다. 그러자 스님이 물끄러미 웃으면서 말하기를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맹사성은 이를 교훈으로 삼아 훗날 조선의 청백리요, 명재상 중의 한 분이 되었습니다.

 

※ 맞춤법에 자신이 없어 '부딪치고'와 '부딪히고'의 두가지를 가지고 망설였습니다. 차이를 알아보니 '부딪치고'는 '부딪다'의 능동형이고 '부딪히다'는 '부딪다'의 피동형으로 나와 있네요.  즉 '부딪치다'는 내가 상대를 향해 작용을 미치는것이고, '부딪히다'는 상대가 나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의 뜻으로 보아서는 "고개를 숙이면 내가 남과 부딪 일도 없고, 남이 나에게 부딪 일도 없다"라고 새겨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부딪히다'와 '부딪치다'의 두 가지를 나란히 썼음을 알립니다.   

 

2) 교만이 쌓은 바벨탑

 

< 바벨탑, 대 피테르 브뢰헬, 1563, 보이만스 반 뢰닝겐 미술관 >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짧고도 매우 극적인 일화(逸話)가 실려 있습니다. 아래는 바벨탑 이야기가 담겨 있는 창세기 11장의 내용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 1~9)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을 상징합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과 같아지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립니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교만이 차오르면 하늘 높은 것을 모릅니다. 서로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고 다른 얘기를 듣지 않습니다. 소리는 오고 가지만 소통은 되지 않습니다. 같은 언어를 주고 받는 경우라도 뜻이 다르고 서로에게는 외국어와 마찬가지가 되고 맙니다. 결과는 뭉침에서 흩어짐으로, 협력에서 대적(對敵)으로 변하고 맙니다. 바벨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3) 자랑할 것이 없는 까마귀

 

우화(寓話)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숲속에 사는 새들을 불러 임금을 뽑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작새가 화려한 날개를 펼치며 말했습니다.“나만큼 화려하고 기품이 넘치는 새는 없어. 내가 바로 임금감이지.”

이번에는 백조가 나섰습니다. “나는 눈처럼 깨끗하고 고결하답니다. 알록달록 정신없는 공작새보다는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이 어울리지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나는 매우 빠르게 날 수 있어. 내가 임금이 되어야 해.” “나는 똑똑해. 내가 임금이 되어야 해.” 하고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느라 다른 새가 하는 얘기를 듣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드디어 새들의 자랑이 끝나고 조용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까마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느냐?”

“하나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친구들이 많아서 행복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은 까마귀를 새들의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지금부터 까마귀가 너희들의 임금이다. 너희들은 모두 자기 자랑을 하느라 남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까마귀는 모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까마귀는 어느 새에게 어떤 장점이 있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 까마귀가 새들의 임금이 되어 이끄는 것이 가장 좋으니라.”

 

 

♠ 무릇 교만한 자는 억지로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자기를 낮추지만 하늘이 그를 높입니다. 그래서 명심보감은 "교만은 손실을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다(안분편, 5조)"고 가르치고, "그릇은 차면 넘치고, 사람은 교만하면 망한다(성심하편, 26조)"고 경책(警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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