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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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핵심 실존 인물들 실제생애를 찾아 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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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참모총장(대장)

12.12 쿠테타 직후 날조된 죄목으로 10년을 선고 받고 7년형으로 감형 되었으며, 무려 참모총장(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함.

강제로 옷을 벗기고 "아직도 총장인 줄 아냐!!"는 모욕적인 언사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함.

 

1981년 3월 사면, 복권

1993년 12.12 사태의 주범들을 검찰에 고발

1997년 재심으로 무죄판결 받음

1999년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회장 역임

2002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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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소장)

12.12 군사반란 진압 실패 후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서빙고분실에서 45일 간의 조사와 문초를 받았다.

이후 6개월간 가택연금을 당하며 보안요원들의 감시속에 살았으며, 이 충격에 부친은 이듬해 별세하였다,

 

장태완의 아들 장성호는 가택연금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1981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하여 학년말 전과목 A학점으로 수석을 차지했으나, 82년 1월 9일 집을 나간지 한달 동안 행방불명 되었다가 2월 12일 경북 칠곡군 낙동강변 산자락에서 꽁꽁 얼어서 사망한 채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의문사로 남음.

 

2010년 장태완 별세후 아내분은 우울증을 앓게되는데 12.12 군사반란시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헌병감이 12.12. 군사반란은 장태완의 무모한 명령으로 일이 커지고 군인들이 죽었다고 자신들을 정당화한 회고록의 책을 출판했고, 책이 나온 바로 다음날 장태완의 아내분은 극단선택으로 투신자살(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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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주.특전사령관(소장)

12.12 군사반란 진압 도중 부하에게 총격당해 부상을 당함.

직속 부하였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는 이미 배신한 상태였음.

이후 1980년 소장으로 강제 예편 당함.

 

1987년 12.12 군사반란 주범이 언론에 이를 미화하는 발언을 하자 격분하여 87년 11월에 김진기 전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군사반란의 위법성을 주장하였으나 1988년 10월 실종되었고, 1989년 3월 송추의 야산(군부대.출입통제지역)에서 139일 만에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위장한 국가정보기관의 소행이 의심되는 의문사로 남음)

 

결정적으로 정병주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 정병주가 생존했던 시점까지 군부대가 주둔해서 출입통제지역으로 분류된 곳이라 논란에 불을 지폈고, 굳이 세상을 하직하려는데 철조망 밑을 파헤쳐가며 출입통제지역에 들어가 목을 매는 것은 선뜻 이해가진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정병주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고인의 무덤 묘비명은 '백비' 이다.

]즉,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데 묘비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은,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라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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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기.준장 (육군본부 헌병감)

1979년 12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 하였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제 된다.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군사반란 직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이후 얼마 안가 쿠데타 주역들의 장식품이 되기 싫어 1980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함

 

90년대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자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 예비역 장성들인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별세(향년 74세)

(생전에 "평생을 12.12 쿠테타의 악몽에 시달렸다" 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심적 고통속에 살았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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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소령 (특전사령부 사령관 비서실장)

반란군에게 6발의 흉탄을 맞으며 현장에서 즉사,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 되었다가 이를 알게된 장교들이 항의하자 3개월 후, 1980년 현충원으로 이장됨.

부친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홧병으로 사망하였고, 부인이었던 백영옥은 시력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완전 실명

 

매월 30만의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 군인아파트에서 쫒겨난 후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복지시설에서 전화상담 봉사활동을 하였다.

 

1990년 12월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고, 이후 1991년 6월 28일 부산불교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당시 수사에서 자살로 마무리 되었다가 유족들의 반발에 실족사로 수정했으나 석연찮은 의문이 있었다.

 

한편, 김오랑을 사살한 체포조를 지휘한 박종규 중령은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소장 계급까지 진급하였으나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청 당시 강제 예편되었고,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으로 부터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고 군인연금도 끊겨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면서 죽을 때까지 식도암으로 고생하다가 2010년 12월 7일 사망했다.(향년 67세)

뒤늦게나마 참회했는지, 죽기 1년 전인 2009년 12월 9일, 참군인 김오랑기념사업회에 전화를 걸어자신이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하늘의 벌이라면서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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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 언 』

영화 ‘서울의 봄’ 을 관람하고서..

그 시절을 겪은 세대로 대부분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었지만 기억 속에 다시 상기되어서 울분을 안주 삼아 술병을 많이도 비웠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쿠테타로 성공한자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합리화한 말이 아닐까?

 

지금도 반란군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Site를 접하면서 느끼는 게 있다.

진실을 왜곡한 정보를 역사에 남기려는 것은 서로 다름이라는 논지로도 논할 수도 없다.

 

80년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반란군들에 의해 왜곡된 부끄럽고 뼈아픈 역사를 후세들에게 바로 알리는 큰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위안을 받고 싶다.

 

끝으로..제 Web Site & SNS방문해주신 온라인 친구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저와 정치적 이념이나 개인의 사상, 가치관 등.. (Ideology)의 다름으로 불편함을 느끼신다면 언제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팔로우취소」 「프로필차단」 「친구끊기」 등 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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